우리집 이야기

나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제주조천 2008. 7. 2. 12:46

나의 할아버님과  할머님의 아름다운 삶의 이야기

 

1951년은 6.25가 일어난지 1년이 되는 해이다.그 해  할아버님이 90살, 할머님은 83살이었다.할아버님이 음력 6월 22일 돌아 가시고 할머님은 그 해  8월 17일 돌아 가셨으니 55일 전후로 해서 두 분이 저 세상으로 가신 것이다. 90 평생을 잉꼬새 처럼 사이좋게 사시다가 두달도 채 안되어서 두 분이 나란히 저 세상으로 가셨으니 모두들 부러워 했으며 널리 회자되기도 하였다.  참으로 복 많은 두 분이 아니였나 생각한다. 아름답고 열심히  살으셨던 두 분의 삶이 세월이 흐르면서 자손들에게  알려 지지 않고 잊혀지는 것이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이 세상에 이 두 분의 이야기가 나 이외에는  아는 사람이 없으니 내 책임이 너무나 크고 죄를 짖는 것 같아 죄송스럽기만 하다. 이제 내가 60여년전의 희미한 추억과 기억을 더듬으며  두 분의 삶의 이야기를 쓰는 것은 자식이나 조카들에게 사실대로 똑바로 알려 그들이 그 자식들에게까지 전하면서 우리 조상들이 그 시대에 이렇게 아름답고 열심히 살았구나 하고 영원히 기억했으면 하는 바램으로 이 글을 쓴다.                              나의 할아버님은 치(致)자 영(永)자 함자를 쓰시는 증조부와 제주 고(高)씨의 증조모임 사이에 둘째 아드님으로  1861년 5월 12일에 태어 나셨고 성함은 진(振)자 옥(玉)자이시다. 위로 4살 위인 진(振)자 철哲)자 성함을 가진 형님이 한분 있으셨다.언젠가 이야기 했지만 할아버님은 구좌면 월정리에 태어나셨고 거기서 자라시시다가  할아버님이 4살 되던 해 고(高)씨의 증조모님인  어머님이 물질하러 바다에 가셨다가 돌아 가셨다. 致자 永자 증조부님은 4살과 8살 되는 아들 둘을 데리고 구좌면 월정리를 떠나 아무런 연고도 없는 조천면 조천리로 옮겨와 살게 되셨다고 한다. 

 할아버님은 사진에 보듯이 키는 조그만 하셨지만 성품이 온화하시고 부지런 하셨다. 동네 어른들의 말에 의하면  남과 싸움 한번 안하셨고 화가 난 모습을 본 일이 없다고 하셨다.형님 되시는 振자 哲자 할아버님은 나이가 들면서 장사 하신다고 밖으로 나가셨지만 우리 할아버님은 어린 때부터  치(致)자 영(永)자 아버지와 함께 농사를 지으시면서 한 평생 한 곳에서 살으셨다고 한다.할아버님은 장성해서 수원 백씨와 결혼하여 사준(仕俊)  아들을 낳으셨는데  할머님은 24살 젊은 나이에 단오전 날인 5월 4일에 돌아 가셨다. 그 후 할머님인 전주 이씨(아래 사진)를 배우자로 맞이하여 3남 7녀를 두셨다. 내가 아버님께 들은 이야기로 할아버님은 얼마나 부지런히 일 했는지 손바닥 금이 닳으실 정도라고 하셨다. 아주 어릴 때 부터 어머님이 돌아 가셨기 때문에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시고 아버지를 도와 일찍 부터 농사일에 힘 쓰셨다고 한다. 형님인 진자 철자 할아버님은 육지로 장사를 해서 큰 돈을 벌어 잘 살았지만 할아버님은 묵묵히 농사를 지으면서 한두평씩 밭을 넓혀 가시면서 집안을 일으켜 세우셨다고 한다. 할아버님은 자기가 공부를 못한 한을 자식들에게 물려 주지 않으시려고 사준 큰 아들을 일찍부터 신식교육에 입문시키셨고 17세에 서울로 유학까지 시키셨다고 한다. 사준 아버지가 1881년생이시니까 17살이면 1897년이라고 생각한다. 그 당시 제주도에서 서울로 유학을 보낼 정도였으니까 할아버님의 교육열은 대단한 걸로 짐작이 간다. 그러나 할아버님의 믿음은 2년 뒤 사준 큰 아버지가 전국적으로 퍼진 전염병에 걸려 돌아 기시게 된다. 얼마나 낙심하고 절망했는지 며칠 몇날을  물 한모금 마시지 않으셨다고 한다.  그 후 전주 이씨 할머니를 맞이해서 준호 둘째 아드님이 태어 나셨는데 준호 둘째 아드님은 어릴때 부터 서예를 잘 하셔서 할아버님을 기쁘게 하셨다고 한다. 서예에 조예가 큰 어른이 있으시다면 어디이든 찾아 가셔서 아들에게 서예를 가르쳐 주기를 부탁했다고 한다. 준호 아버님의 19001년에 태어 나셨으니까 10살이면  한일 합방이 되던 그 시기인데 할아버님은 둘째 아들인 준호를 서예로 대성시키기 위해 땅을 팔아 가면서 온 정성을 다했다고 한다. 일곱 분이 되는 딸들도 모두 닥나무 종이를  다듬이로 하루 종일 두드렸는데 그것은 그냥 한지에 서예를 쓰는 것 보다 다듬이로 두드려 써야 잘 써지게 되고 오래도록 보관해도 변하지 않기 때문이이라고 한다. 그 뿐만 아니라  서예를 가르쳐 주기 위해 오는 사람, 배우러 오는 사람 때문에 집안은 항상 시끌벅적거렸고 그 뒷치닥거리에 딸들은 온 힘을 쏟으셨다고 한다.난 어릴때 아버지께서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 마다 할아버님은 대단한 집념을 가지신 분이라고 자랑스럽게 생각하셨다.  한창 서예가로 명성이 알려 지기 시작했고 제주도는 물론 육지에서까지 서예를 잘한다는 사람들과 교분을 쌓던 중  또 다시 집안에 불행이 닥쳐 왔으니 1919년 기미 3.1운동이 일어나는 해 20살 젊디 젊은 나이로 돌아 가시게 된다. 너무나 큰 충격으로 그 후로 할아버님은 모든 의욕을 잃고 농사 일도 그만 두시면서 가세가 점차 기우러 지게 되셨다고 한다.그후 아버지는 셋째이지만 위로 두 형님이 일찍 돌아 가셨기 때문에 큰 아들 역할을 해야 했지만 할아버지 생각은 달랐다고 한다. 어릴때 남에게 잘 났다거나 착하다고 창찬을 들으면 일찍 죽게 된다고 믿게 되었다. 그래서 할아버님은 남에게 욕을 먹더라도 죽지만 말라고 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1908년 생이니까 1919년이면 12살 쯤 되었을 텐데 그 때부터 아버지는 술을 마시고 동네 어른, 아이 가리지 않고  싸움을 했지만 할아버님은  야단은 커녕 잘 했다고 격려까지 하셨다고 한다. 그러니 아버지는 동네에서 소문난 악동으로 자라게 되었으며 그것은  모두가  할아버지가  남에게 욕을 먹어야 오래 산다고 믿었기 때문이였다.그러다가 아버지가 16살 되던 해 조천국민학교를 졸업하면서 (아버지는 조천국민학교 1회졸업생임)  졸업생 대표 몇 사람이 졸업비를 받았는데 (그 중에 아버지도 끼여 있었다 함 )  받은   졸업비로 술을 사서 다 탕진하고는 졸업을 며칠 남지 않고 일본으로 도망쳐 버렸다고 한다. 첫 졸업이라 졸업 기념품도 사고 해야 되기 때문에 지금 돈으로 백 몇 십만원쯤 된 돈을 다 써 버렸으니 학교에서 찾아 오고 순사가 오고 야단이었지만 할아버님은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 다 변상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으로 도망간 아들을 찾아 와서는 그까짓 돈 때문에 일본으로 도망쳐 오느냐고 사내가 그리 째째하느냐고 하면서 나무라셨다고 한다.    내가 아홉살 되던해 할아버님이 돌아 가셨으니 제법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많이 남아 있다.            우리는 안체에 살으셨고 할아버님와 할머님는 바�채에 살으셨지만 나는 눈만 뜨면 바�채로 달려가 거기서 시간을 많이 보냈다. 할아버님은 한시도 쉬는 모습을 본 일 없다. 할머님이 뭘 하려고 하면 "놔더 놔더" 하시면서 할아버님이 다 하셨다.   

   할머님은 옛날 여자분들처럼 이름은 없고 본관만 사용했는데  전주 이(李)씨이시다. 키가 매우 크셨을 뿐만 아니라 동네에서 제일 가는 미인이셨다. 항상 흰 옷을 곱게 입고 마루에 앉아 마당에서  할아버님이 일하는 모습을 바라다 볼뿐 아무일도 하지 않으셨다. 젊을 때도 그랬다고 한다. 할아버님은 재혼이였지만 할머님은 처녀 몸으로 할아버님 안테 시집왔으니 그럴만 하다고 생각하였다. 더구나 할머님은 전주 이씨로 친정이 잘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할아버님이 원체 부지런하고 똑똑하니까 친정 아버지가  허락했지 않았나 생각한다.  해방이 되고 아버지는 식구들을 데리고 고향에 돌아 왔지만 평생 농사 일을 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농사 일은 할아버님 몫이였고, 어머니만 옆에서 거두는 정도였다. 그 당시 할아버님 나이는 88세였지만 농사 일을 척척 할 정도로 정정하셨다. 보리 밭 매기, 보리 베기, 보리 타작 모두가 할아버님이 혼자  했으니 믿기지 않을 것이다.  할아버님은 그렇게 집안 일뿐만 아니라 대소사 모든 일을 혼자 하셨고,  할머님은 항상 방이나 마루에 앉아 오고 가는 사람 쳐다 보는 일이 전부였다. 그렇다고 몸이 어디 불편한 것도 아닌데 정말 할아버님은 지독한 애처가이셨다.그 당시는 방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서는 구들목에 보리 타작하고 난 꺼시레기를 떼야 하는데 구들목 떼는 곳이 원체 좁아서 연기가 엄청 났었다. 보리 꺼시레기에 불이 어느 정도 붙일데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연기가 어떻게 나는지 숨을 쉴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다. 보통 그런일은 어머니들이 하는 일인데 할머님이 어쩌다 그 일을 할려고 하면 할아버님은 큰일 난 것처럼 큰소리로 말리고 할아버님이 하시는 것이였다. 정말 할머님은  할아버님의 지극한 애정으로 세상 물정 모르고 귀부인처럼 곱게 곱게만 평생을 살으셨다. 그래서 그런지 80이 넘으셔도 살결이 어린 아이처럼 곱고 기품이 있으셨다. 그러나 평생 1원 한장 할머님 혼자 써 보지 못했으니 꼭 행복한 것만은 아닌가 하고  지금 생각해 본다.   할아버님은 4남 7녀 11남매를 낳으셨지만 같이 살아 본 아들 딸은 하나도 없었다. 위로 두 아들은 일찍 세상을 떠나보냈고 나머지 두 아들도 일찍 일본에 건너가 거기서 결혼하고 살았으며 딸들도 거의 일본에 건너가 살았기 때문에 고향집엔  오로지 할아버님과 할머님 두 분만이  살면서 자식들을 그리워 하며 살았던 것이다. 그런데 해방이 되고 어느날 갑자기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손자를 둘이나 데리고 같이 살겠다고 돌아 왔으니 얼마나 기뻤는지 짐작이 간다.내가 다섯살, 원환이가 두살이었으니 할아버님, 할머님 눈에는 얼마나 귀여워했는지 짐작이 간다. 할머님은  심지어 원환이가 똥을 싸면 입에 대 보고 건강한지 어디가 아픈지를 살필 정도였고,할아버님은 어디 외출할 때면 항상 나를 데리고 다녔다. 그리고 동네 분들이나 친구분들, 친지들에게  " 내 손자인데 어떼?  잘 생겼지?  얼마나 똑똑한지 몰라"  하고 자랑하였다.   그리고 그 이듬해 내가 여섯살 되던 해 어느 봄날  초등학교에 다니는 동네 형이 학교에 가자고 하는 바람에 같이 따라 갔었다. 그런데 잠깐 밖에 나갔던 아이가 돌아 오지 않자 집에서는 야단이었다. 아무리 찾아 보아도 없고 본 사람도 없었다. 동네가 발칵 뒤집어 지고 동네 분들이 모두 나서 찾았지만 찾을수가 없었다.  할아버님은 내가 바닷가에서 놀다가 빠져 죽은 줄 알고 대성통곡을 하면서 바닷가 이곳 저곳을 찾아 헤메이였고 그래도 찾지 못하자 물에 빠져 죽으려고 하는 바람에 동네 어른들이 혼 났다고 한다. 나는 그런줄도 모르고 오후가 되어서 그 형과 함께 집으로 돌아 왔는데 그 때 할아버님과 할머님은 방에 누워 있었고 동네 어른들이 쭉 둘러 앉아 있었다. 나를 보자 모두들 어쩔줄 몰라했고 할아버님은 자리에 누워 있다가  한걸음에 나를 안고  "잘 왔다 잘 왔다. 내 손주가 죽지 않고 살았어"  하면서 얼굴을 부비는 바람에 나는 영문도 모르고 어리둥절 하였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할아버님과 할머님이 얼마나 나를 사랑했는지 알 것 같다. 그러다가 내가 아홉살 , 할아버님이 아흔살이던 1951년 그 해도 보리 타작 할때도 할아버님은 어느해 처럼 이일 저일 혼자  다 하셨고  어머니는 할아버님이 시키는 일이나 하셨으며 할머님은 여전히 마루에 앉아 할아버님이 일하는 모습만 쳐다 보곤 하였다.보리 타작도 끝나고 나서 며칠 후 어느날 그때 아버지는 면사무소에 다니셨는데 저녁 식사후 할아버님이 다른 날과 달리 일찍 자리에 눕더니 밤 10시쯤 되자  아버지 보고 일으켜 세우라고 하고는 조금 있으면 자리에 누위라고 하고  그리기를 몇 시간 후 아마 새벽 3-4시쯤 되었을까 숨이 가빠지더니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내 손을 잡더니 어머니에게 조용히 말씀 하셨다. 그 순간 그 음성는 지금 60년여년이 가까운 세월이 지난 후이지만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 얘 며늘애야, 일 못하는 남편과 한평생 살아 보니 힘들지?

  네 자식은 어릴때 부터 일을 시켜라. 귀한 자식 일수록  일을 시켜야 한다.

  지가 커서 잘 살게 되어  남에게 일을 시키려 해도  자가가  알아야 잘 시킬 수 있으며  

  또 못살게 되면 힘들지 않고 쉽게 역경을 이길수 있는 거란다.

  부지럼함은 천만금보다 귀한 거란다. "

  그리고 운명하셨다.

난 평생 할아버님의 유언을 나의 인생 지침으로 삼고 지금까지 살아 왔다.

 할아버님이 돌아 가시자 할머님은 말을 끊으셨다. 누가 뭐라고 해도 대답 한 마디 하지 않으셨고 하루 종일 마루에 앉아 대문만 바라보며 한 없이 우시기만 하셨다. 그러다가 초하루 보름날 삭망 하는 날에는  안체까지 오셔서  엉엉 소리내어 우시는 것이였다. 나하고 원환이는 할머님을 즐겁게 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그렇게 귀여워 하던 손자들인데 쳐다 보지도 않고 밥도 잘 안먹고 멍하니 대문만 쳐다 보며 우시는 것이였다. 할아버님이 음력 6월 22일에 돌아 가셨는데 두달이 채 안된 그 해 8월 17일에 할머니 조용히 운명하셨다. 할머니가 돌아 가던 날애도   아버지에게 뉘워라 일으켜라 몇번 하시다가   "아!  아!   창 밖에 저 고운 나비들 너무 아름답구나!"  마지막 말을 남기고 운명하셨다.  아마 창 밖에 날던 그 고운 나비는 평생 고운 나비처럼 살던 자신이 아니였을까? 할머님이 여든 세살이었다.모두들 할아버님과 할머님의 아름다운 마지막을  칭송하였고 그 이야기가 널리 회자 되기도 하였다. 90 평생 그렇게 잉꼬새 처럼 사이좋게 사시다가 두달도 채 안되어서 두 분이 나란히 저 세상으로 가셨으니 모두들 부러워 했다.  참으로 복 많은 두 분이 아니였나 생각한다. 할아버님! 할머님! 지금도 저 세상에서도 두 분이 행복하게 지내고 계시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