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이야기

아버님, 어머님 이런분이셨다.- 제2편

제주조천 2008. 4. 4. 06:04

  아버님, 어머님 이런 분이셨다.-제2편

 

1957년 내가 중학교 2학년때 까지는 아버님은 면사무소에 다니고 어머님은 농사를 열심히

 지었기 때문에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하였다. 

그 때까지는 할아버님 제사때에는 안채, 아래채도 모자라  마당에  까지  멍석을 깔고 천막을 치고 손님을 받곤 하였다.

그만큼 아버님은  발이 넓고 사람을 좋아해서 많은 사람들로 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또 어머님 외가 친척들도 참 많아서 제사 때에는 야단법석이였다.

제사 아닌 때에도 항상 집안에는 손님들로 붐볐고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지기도 하였다. 아마 틀림없이 아버님은 항상 야당 기질을 타고 났기 때문에 현실 정치에 불만이 많았고 뜻이 맞는 친구들분과 늦게까지 시사 이야기를 하면서 울분을 토했던 같다 

1957년 내가 중학교 2학년이고 원유가 태어난 그해는 처음으로 지방자치단체 선거가 있는 해였다.

면장을 주민들이 처음으로 직접 투표로 뽑도록 되었기 때문에 동네에서는 누가 면장 후보로 나서는지 모두들 관심이 많았다.

 

어느날 아버님께서는 어머니와 우리를 불러 앉히고는 지금 면장하는 사람이 썩었기 때문에 내가 바꿔야 하겠다는 것이다. 모두들 아버님 보고 면장으로 나가라고 하는데 아버님은 돈이 없기 때문에

돈이 있는 아버님과 뜻이 맞는 OOO와 리턴 매치해서 부면장으로 나가기로 했다고 하는 것이였다.

그러나  선거 결과는 아버지가 낙선했고 면사무소를 나와야 했었다.

면사무소를 그만둔  어느날 어머님과 우리를 불러 앉히고 

"안 그래도 면사무소를 나올려고 했는데 잘 됐다. 면사무소를 나와도 너희들 굶기지는 않을테니까 염려마라 더 열심히 살아보자" 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때부터 남의 밭은 빌려 농사를 짖기 시작했다. 뱅두왓이라느 곳에 천평쯤 되는 꽤 큰 밭을 

빌려 농사를 본격적으로 짖기 시작하였다.

참으로 열심히 일했지 나도 아버님과 어머님 그리고 원환이까지 거둘었었지

여름방학엔 하루도 쉬지 못하고 아침 일찍 밭으로 가서 저녁 늦게까지 김을 메곤 하였다.

 

그러나 밤낮으로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밭주인과 5대5로 나누기 때문에 소출이 얼마 안 되었으며

 우리집 식구가 여덟이기 때문에 항상 식량이 부족해서 장리빚을 지어야 했었다. 장리빚이라는 것이 한번 지기 시작하면 헤어나지를 못했다. 10말(80kg)을 빌리면 그 이듬해 15말(120kg)을 갚아야 하기 때문에 농사 지으면 거의 장리 빚으로 나가고 또 다시 장이빚을 지어야 하는 악순환이 시작되는 것이란다.

 

  나는 조천 중학교에 들어갈때 전교 1등으로 들어 갔기 때문에 월사금(회비)는 내지 않았지만 기타

내야 하는 잡부금도 꽤 되었는데 한푼도 내지 못하였었지. 그러나 그 말을 아버님이나 어머님께 말씀 드리지 못했었다. 나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한번도 점심 도시락을 가져 가지 못했었다. 밥에 보리쌀은 조금밖에 넣지 못하고 바다에 나는 톨이나 무우를 썰어 밥에 넣어 먹었고 그것도 점심 도시락을 쌀 여유가 없기 때문에 한번도 도시락을 가져 간 적이 없고 점심 시간에는 혼자  학교 울타리를 넘으면 바로 산소가 있는데 그 곳에서  보내곤 하였다. 그러나 한번도 부모님을 원망해 보지 안했고 학교에 보내주는 것만으로 감사하게 생각했었지 

 

1959년 나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여야 하고 원환이도 중학교에 들어가야 하는 해였다.

그러나 사정이 밥 먹기도 어려운데 어떻게 진학 꿈이나 꾸겠나?

그런데 어머님 생각은 달랐다. 어떻게 해서든지 돈이 들지 않은 사범학교라도 가야 한다.그래서 빨리 선생님이 되어서 동생들 뒷바리지를 해야 된다. 라고 말씀하셨다. 동네에서는 모두들

'밥도 못 먹는 주제에 고등학교는 무슨 고등학교냐  분수를 몰라도 저렇게 모르느냐?' 라고 수근수근 대었지만 어머님의 생각은 확고하였다. 그리고 나 보고는

"너는 꼭 사범학교애 붙어야 한다." 라고 몇번이나 말씀하셨지 왜나하면 사범학교에 들어 가려면 경쟁율이 10대 1이 넘었기 때문에 촌에서 사범학교에 붙으면 동네 잔치를 하던 때였다. 나는 밤을 세워가며 열심히 공부한 결과 사범학교에 합격할수가 있었다.

우리 조천 중학교에 30여명이 사범학교 입학시험 보았는데 나하고 여학생 하나 둘만 붙었다.

어머님이 확고한 교육관이 아니었으면 아마 난 중학교 졸업으로 끝이었겠지   

 

아마 너희들은 밥을 굶는다는 것이 어떤 고통이라는 것을 모를 것이다. 점심 한끼가 아니라 하루 종일 아니 이틀 사흘 동안 굶는다는 고통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고통이란다.

금년만은 꼭 장리빚에서 벗어나자고 하지만 쌀이 한톨도 없고 어린 자식들이 한끼 두끼 굶는데 아버님과 어머님 마음은 어떻겠니?  그러면 할수 없이 또 장이 빚을 지어야 하고

그래서 아버님께서는 농사를 지어 보아야 자식들 �기기만 하겠다고 마침 내가 제주시에 자취를 하게 되자  제주시로 와서 공장에 다니게 되었다. 그 공장 주인은 아버님이 문중 일을 보는 동안 알았던 한씨 집안 사람인데  그 공장은 영세하기도 하지만 자기 배를 불리는 사람이라 월급을 두달 석달 밀리기가 다반사라 정말 쌀 한톨이 집안에 없을 때가 많았단다.

겨우 사정 사정해서 돈 몇푼 받으면 그것으로 보리쌀을 조금 사서 걸머지고 제주시에서 조천까지 12km나 되는 길을 밤에 걸어 가서 조천 식구들에게 주고 아침 일찍 걸어서 제주시로 오곤 하였단다. 보통 제주시에서 조천까지는 걸어서 가면 두시간 걸리는데 그 길을 밤사이에 걸어서 갔다 오곤 하였다. 아버님은 그때 심정을 일기로 꼬박꼬박 쓰셨는데 아버님이 돌아 가신 후에 그 일기를 보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어미제비가 먹이를 물고 오기만을 기다리는 제비새끼들 모양으로 아버님만 기다리는 동생들을 보면서 아버님은 피를 토하듯 그 심정을 일기로 썼던 것이다.

 

나는 62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집안을 책임지는 큰아들로서 월급을 거의 90%이상 어머님께 보냈단다.  10%로 어떻게 생활했느냐고? 난 선생하면서도 가정교사를 하여 내 생활비는 할수 있었지.

내가 20살, 원환이가 17살, 원숙이가 14살, 원배가 10살, 원심이가 7살, 원유가 5살  내가 월급을 보내지 않으면 식구들이 굶는데 내가 남처럼 선생이라고 돈을 쓸수 있겠니?

그 당시 밭 농사는 할머니가 빌려준 400평쯤 되는 밭에서만 농사를 지었지만  어머님은 내가 보내는 월급과 농사를 지은 수입으로 먹고 생활하는데도 부족하였지만 아끼고 아껴서 그런 속에서도 원배 원심이 원유를 중학교에 보내고 야간이이지만 원배와 원유는 고등학교에 까지 진학할수 있었던 것은 아무리 어려움이 있어도 자식들은 꼭 공부를 해야 한다는 어머님의 확고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란다.

 

너희들 아빠를 그렇게 사랑했던 할아버님과 할머님인데 너희들이 잊으면 안된다.

그런분의 제사가 언제인지 어디서 하는지 누가 하는지 모른데서야 사람의 도리가 아니잖니?

제사에 참석하지 못하면 전화라도 해달라는 뜻은 할아버님과 할머님을 잊지 말라는 뜻이란다.

왜 내가 너희들에게 이 야기를 들려주는 지 꼭 알아야 한다

명심해 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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