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이야기

나의 20대 이후의 삶

제주조천 2008. 3. 22. 11:52

나의 20대 시절

 

나의 20대 시절은 군대부터 시작이다.

논산 훈련소에서 6주간 훈련을 받고 영천 부관학교로 교육을 받으러 갔다.

그 당시 부관학교는 준 육군사관학교라 불리 울 정도로 시설도 잘 되어 있고

시험이 특히 많았다. 매주 토요일은 4시간 전부 시험 보는 날이었고  석차는 매주 발표하였으며

규율이 매우 엄격하였다. 10주간 교육을 마쳤는데 내가 1등을 하여 100명을 대표하여

부관학교장 표창을 받기도 하였다.  5등까지는 자기가 원하는 곳에 지원할 수 있어

난 제주도와 가장 가까운 부산을 지원하여 군수기지 사령부 인사처에  배속 받아

2년 6개개월간 군 복무를 마치게 되었다.

 


나의 군대 생활은 내 일생을 좌우할 깊은 인연을 만난 곳이기도 하다. 

 내가 근무하는 인사처에는 여군과가 있고 그 여군과에

예쁘장하고 자그만 여군이 있었는데 남자 병사들은 모두들 그녀를 좋아했다.

그러나 여군은 모두 하사 아니면 중사로 남자들 보다 계급이 높아 말을 잘 붙일 수가 없어

속으로만 좋아하기도 하였다. 우리 인사처에는 남자 병사들이 스물 대여섯 명이 있었는데

 그 여군은 나를 유독 좋아하는 느낌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단둘이서 이야기도 나누어 보지는 못하고

몇몇이 단체로 만나 이야기 할 기회는 있었던 같았다.

그 후에 나는 제대하여 복직하였고, 몇 달이 지난 후 편지가 한통 날아 왔는데

 바로 전길여 에게서 온 것이다. 깜짝 놀라 편지를 읽어 보니 군대 있을 때

제주도 주소를 알려 준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 때 그 주소를 기억했다가 

 편지를 제주 집으로 보냈고 여동생이 그 편지를 보고 거창 어느 학교에 근무한다고 알려 주어서

거창에 근무하는 학교로 편지를 보낸 것이었다.

그리고 그 후 서로 편지를 주고받고 하다가 나중에 이야기 하지만은

서울대학 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입원한 환자 뒷바라지를 하면서 인연을 이어가게 된다.

 

군대를 제대하고 경남 거창군 고제초등학교에 복직하다.(67년 4월)

 군대에서 제대하고 거창군에 있는 시골학교로 복직을 하였다. 

복직하고 나서 동네 어른들과 협의하여 농촌 환경 정비와 농촌 잘 살기 위한 사업을

주도적으로 앞장서서 추진하였다. 

 마을 공터에 온갖 쓰레기를 치우고 마을 주변에 있는 풀을 베어다가 

 마을 공동 퇴비를 만드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면 우리 반 학생들과 차가 다니는  신작로 길에 파인 곳은 메우고

길가에 코스모스 꽃을 심어 가을이면 지나가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도 하였다. 

 그 후 5-6년이 지난 후 전국적으로 새마을 운동이 일어났는데

난 그 보다 앞서 농촌 운동을 하였던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학생들과 같이 남의 논에 모를 심어 돈을 모우고 벼 베기 할 때에는

마찬가지로 학생들과 함께 벼를 베고

그 삯으로 돈을 모아 집에서 돈을 내지 않아도 전원 수학여행을 다녀오기 하였고

(그 당시 6학년 학생들은 어른 몫을 하고도 남았다.)



그리고 수업연구 대회에 출전하여 금상을 받기도 하였으며 운동부를 조직하여

 탁구와 송구부를 지도하여 거창군 체육대회에 입상하면서

학부모들이나 교사들에게 젊은 교사로서 매사에 열심히 하는 교사라는 명성을 얻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하늘이 시기 하였는지 불행이 점점 다가왔지만 그 불행을 느끼지 못하고

그저 밝은 미래를 꿈꾸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밤에 잠을 자다가 새벽에 정신을 차려 보면 운동장 구석에 있는

세면대에서 차거운 물을 먹고 있는 사실에 깜짝 놀라면서도 그 이유를 모르고

왜 내가 이 시간에 여기 있지? 하고 놀랄 뿐이었다. 그러면서 점점 몸무게는 줄어들고

어디를 가거나 마시는 물이 있는 곳 만 찾게 되었다. 물을 마셨다면 2L짜리 주전자 물을

한꺼번에 다 마시고 그 대신 오줌은 5분내지 10분마다 나왔고 오줌양도 엄청 많이 나왔다. 

 그러니까 버스를 타지도 못하고 여기저기 다닐 수도 없었다. 

  그러면서 몸무게가 급격이 줄어드니까 주위에서 병원에 한번 가보라고 이야기를 하여

10월 어느 날 병원을 찾아 갔다. 여러 가지 검사를 받고 원장님 앞에 앉았는데

심각한 얼굴로

    “빨리 서울로 올라가서 큰 병원에서 치료 받으세요. 그렇지 않으면 몇 개월 살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그 후에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떻게 버스를 타서 집에 도착했는지

지금도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단지 요붕증이라는 쪽지만 내손에 쥐어져 있었다. 

 아무런 생각도 없고 단지 무섭고 떨리기만 하였다. 그리고 그 이튿날 편지를 썼다. 

 요붕증이라는 병이 어떤 병이고 입원하면 고칠 수 있는지 그리고 돈은 얼마나 드는지를 물었고

주소는 서울대학교 대학병원장 귀하라고 쓰고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보내고 20여일이 지난 어느 날 회답이 왔었다. 

 고칠 수 있다든지 돈이 얼마 든다든지 그런 말을 없고 빨리 입원하라고 하는 말 밖에 없었다.

황급히 연가를 내고 서울 대학병원으로 갔었다.

그리고 그 때부터 검사 또 검사 매일 같이 검사만 하였고 서울에 있는

메디칼센터 외국인 교수들도 찾아 왔었다. 그렇게 시작한 병원 생활이 87일째 되는 날

담당 교수가 자기 방으로 찾아오라고 해서 찾아 갔더니 현재 의학으로는 고칠 수가 없고

미국 시카고 대학에 갈 수 있으면 한번 가 보는데 거기서도 확실히 고칠 수 있다고

장담하기는 어렵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너무나 기가 막혀 나는 여기서 죽으면 죽었지 퇴원 할 수는 없다 라고 울면서 매달렸지만

그 이튿날부터 밥이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도 일주일을 버텼지만

결국 퇴원하고 제주로 내려갔다. 교수님이 퇴원하는 날 부르더니

퇴원하거든 조용한 절에서 지내면서 마음을 다스리라고 하셔서 어머님이 다니는 절에 가 있게 되었다.

어머님이 다니는 절은 여자 스님이었는데 뜸이 전문이었다.

그 때부터 여기저기 뜸을 뜨고 그리고 법당에 가서 향을 피우고 기도하는 것만이 일상이었다.

매일 기도하는 말은 똑 같았다.

“부처님 살려 주십시오. 25살 청춘이 아깝지 않습니까?” 

 그러면 어떤 날은 부처님이 빙그레 웃으시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떤 날은 찡그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몸은 점점 말라가고 뼈만 앙상한 모습이었다. 

 몸무게가 42Kg 밖에 나가지 않았다. 그런데 어머님이 더 걱정이었다.

  원래 어머님은 점을 본다든지 굿하는 무당을 싫어했는데  남편도 저 세상으로 보내고

큰 아들이 죽어 가고 있으니 어머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무슨 짓을 하던지

 아들을 살려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그래서 무당을 불러 굿을 하고,

 점쟁이를 찾아다니면서 또 빚을 내고 쌀독에는 쌀이 있는지 없는지도 알지 못하고

 동생들은 밥을 먹는지 못 먹는지 생각할 여유가 없이 미친 사람처럼 헤메이고 다녔다. 

 내가 살 수만 있다면 빚더미에 앉더라도 갚으면

될 터이지만 결국 난 죽을 것이고 남은 동생들은 거지 밖에 될 수 없으니

내가 죽어야 한다 라고 결심하였다. 그래서 약방에 가서 잠이 안온다고 말하고

 수면제를 2-3알씩 모았다. 그리고 50 몇 알을 모았는데 같이 있던

스님이 서울 가시는 날을 선택하여 죽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저녁8시쯤 인적이 끈어진 시간에 수면제를 먹고 죽으려고 하는데 눈물이

 어찌나 많이 나는지 쉽게 약을 먹을 수 없었다.

  그때 밖에서 대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대문을 열고 보니

 어머님이 계셨다. 좀처럼 밤중에 절에 찾아오시는 일이 없었는데 놀라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방으로 바로 들어가더니 약을 보시고는 대성통곡을 하셨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너를 살렸구나! 그렇게 말씀 하셨다. 

 초저녁에 어머님이 잠깐 잠이 들었는데 꿈에 할아버지가 나타나셔서

 “얘야, 무엇하니? 빨리 원규에게로 가 보아라!”

하셨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캄캄한 밤길에 산속에 있는 절에까지

한 걸음에 달려 왔다고 하셨다. 나도 그 말을 듣고 할아버님이

날 살려 주실지도 모른다는 신념이 생겼고 죽음에 대한 공포도 점점 사라지고

마음이 안정하게 되자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아 이듬해 3월에 다시 교사로 복직하게 되었다.



70년 결혼하고 신접 살림을 차리다. 

68년 3월 다시 복직하였다고는 하나 물을 많이 마시고 소변을 자주 보는

그 병은 그대로 이고 혼자 생활하기가 힘들었다.

그 당시 내 아내 될 사람은 군대를 제대하고 안양 우체국에 다니면서

 2주일 마다 서울대병원에 가서 약을 타다가 시골로 보내 주었다.

그리고 몇 달에 한번씩 거창으로 와서 결혼하자고 이야기 했지만

 나는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결혼 할 수 없다고 말하면

자기가 뒷바라지를 잘 할 터이니 걱정하지 말고 결혼하자고 나를 설득하였다.

69년 겨울방학 때 장모님이 나를 보자고 하여 그 해 겨울 방학을 서울에서 지냈다.

거의 10여일을 지나고 다시 거창으로 간다고 말씀 드렸는데 장모님이

“자네 결혼하게 저 아이가 저렇게 우기니 부모가 질 수밖에” 말씀하셨다.

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결혼하라는 말씀은 고맙지만 지금 저의 수중에는 돈이 한 푼도 없습니다.

내년 가을쯤에 돈을 모아 결혼식을 올리고 싶습니다.” 라고 말씀 드리자

“예식장 비용은 우리가 전부 알아서 낼 테니까 자네는 제주에서 부모님만

서울로 모시기만 하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렇게 해서 두 달 후에 서울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거창으로 와서 신혼을 차렸지만 신혼 살림살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하였다. 

 신혼살림을 한 방은 신발 벗고 곧장 방으로 올라서는 마루도 없는 단칸방에

이불장은 고사하고 간이 옷장도 없이 같은 학교 선생님이 마련하여 준

알미늄 궤짝 두 개에 옷을 넣어 두었고 매일 갈아입는 옷은 홰에 걸어 두고 벗고 입곤 하였다.

이불은 알루미늄 궤짝 위에 올려놓았고 경대도 없이 조그만 손거울을 벽에 세워 사용하였다. 

 사과궤짝을 하나 준비하여 숟가락과 젓가락 한 쌍씩 그리고 밥그릇과 국그릇 두 개 올려놓고 

 부엌은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위는 짚으로 얼기설기 덮어 있으나 비가 오면 

고스란히 비를 맞았고 땔감은 솔가지를 꺾어 사용했는데 솔가지를 꺾다보면 

팔 여기저기 긁히곤 하여 새각시의 팔뚝에 상처 가시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러나 아내는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항상 웃으며 주위 사람들을 즐겁게 하였고 너무 행복해 하였다.

엄마는 오른쪽 부엌에서 일하고  누가 보아 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경훈이는 엄마에게로 기어 나오려 하다가 밖으로 떨어져 다치기도 많이 했었다.  

사진을 보면 오른쪽 부엌에 일하는 엄마에게 가려고 울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댓돌 위에 놓인 헌 구두와 고무신이 너무 낭만적인 것 같다. 



    


                



그러나 어렵게 한 신혼생활이었지만 병은 그대로이고 몸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항상 조심스러웠고 두 사람 다 말은 안했지만

과연 언제까지 내가 살 수 있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은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엎친데 덮친격 이라는 말이 있듯이 73년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폐결핵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폐결핵을 앓고 있다는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면 교사 생활을 접을 수밖에 없으니

내 아내는 온갖 좋다는 것은 어디를 가서든지 구해 와서 먹이곤 하였다.

그 때가 대사리라는 곳에 살았는데 4시에 첫 버스를 타고 도살장에 가서 암소의 태아를 사다가

큰 솥에 하루 종일 끓여 먹이기도 하고, 개고기를 사서 집에서 개장국을 끓여 거의 매일 먹이기도 하였다.

  그런 노력 덕택인지 3년 후 폐결핵은 나을 수 있었다.

 그 기쁨도 잠시 다시 간염이 발병하여 병원에 입원하기도 하고

좀처럼 몸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다. 간염은 앉기만 하면

졸리고 항상 힘이 없고 피곤하여 누구와 이야기 하는 것도 싫고

혼자 누워 지내기만 하였으니 답답할 뿐이었다. 좀 나아지다가

다시 재발하고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간경화나 간경변으로 진행 될까 싶어 안절부절이었다.

내가 이렇게 평생 병마와 싸우다 보니 집안 대소사 처리는 아내의 몫이었고

병수발도 또한 아내의 몫이었다. 지금은 내가 아픈 곳이 별로 없고 건강하게 지내게 된 것은

아내가 젊은 때부터 몸에 좋다는 것을 많이 먹였기 때문이 아니가 생각한다.

내 아내는 나의 젊은 시절 온갖 병치레 뒤치다꺼리만 하다가 내가 좀 나아지려고 하니

 덜컥 몹쓸 병에 걸렸고 유명을 달리 했으니 참으로 미안하고 죄송스러울 뿐이다.




이 시절에 찍었던 사진 몇점


내가 군대 간다고 학교 선생님들이 학교 사택에서 송별회를 마치고










 

 

고제초등학교 선생님들과 함께 (67년 어느날)

 

 

 67년 4월에 제대하고 맡은 학생들이 그 이듬해 68년 2월 졸업을 하게 되었다. 

 

 

 

 

 69년 농산초등학교 담임한 6학년들과 함께 운동장에서

 

 

 69년 농산초등학교에 근무할때 6학년 학생들과 경주로 수학 여행을 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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