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이야기

나의 아버님과 어머님

제주조천 2008. 3. 30. 11:58

나의 아버님은 지금부터 꼭 100년전인 1908년 1월 25일에

振자 玉자 할아버님과 전주 이씨 사이에 3남으로 태어나셨다.

할머님은  5남 8녀 모두 13남매를 두셨는데

위로 두분 형님은 아버님이 낳기전인 20세 이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아버님은 장남으로 태어 난 것이나 마찬가지셨다.  

   

 그런 장손인 아버지가 37세까지 자식이 없었으니 할아버님과 할머님은 물론

 여덟분이나  되는 고모님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때 아버님은 어머님을 만나셨고 만난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나를 잉태하셨으니

온 집안 경사가 말로 표현할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어머님은 1915년 5월 23일 아버지 고광률과 박씨 어머니 사이에 딸만 6형제 중에 장녀로 태어나

20세 이전에 안씨 집안으로 시집을 가셨다고 한다.

그러나 자식 하나를 낳고 남편과 사별한채 10년을 혼자 사시다가

일본에 계신 아버님과 혼담이 있어 일본으로 건너가서 아버님을 만났다.

     

그 당시 아버님 나이 37세  어머님 나이 30세,

아버지는 그때까지 결혼을 안 하셨고 어머님은 재혼이였기 때문에 주위에 우려가 크셨지만

1년도 안돼  나를 잉태하셨으니 얼마나 당신들에게 큰 기쁨을 주셨는지 짐작이 간다.

아버님은 자식이 없는 줄 알고 작은 숙부님 큰 아들인 원조 형을 양아들로 삼기로 하였다가

나를 낳으셨으니 금지 옥엽이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처럼 아버님과 어머님 안테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할아버님과 할머님 그리고 고모님들도 나에 대한 사랑은 절대적이였다.

 

그러나 그것보다 아버님은 천성적으로 감성적이셨고 정이 많으셨던 분이고

자식에 대한 사랑이 엄청 많으신 분이셨다.

요즘 아버지들은 자식들과 잘 놀아도 주고 이야기도 잘 들어 준다고 하지만

그 당시 보통 가정의 아버지들은 자식과 이야기 하는 경우가 거의 없고

혹시 이야기 하더라도 일방적으로 아버지 이야기만 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였다.

그러나 우리 아버님은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 가면서 부터 거의 성인 대접을 해 주셨고

대등하게 나의 의견을 묻고 말 할 기회를 주셨다.

물론 일본서 현대 교육을 받은 영향이 크셨지만 자식을 그만큼 사랑한 중거라고 생각한다.  

     

아버님은 내가 6-7살 밖에 안된 나를  아버님이 다니시던 면사무소에 데리고 가서

직원들에게 자랑도 하고,

밤에 숙직실 할 때에도 나를 데리고 가서 숙직실에 재우면서 이야기를 들려 주기도 하셨다.

그뿐만 아니라 이웃 마을에 출장을 가실때에도 자전거 뒤에 나를 태우시고 다니셨고

간혹 제주시에 갈 때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나를 데리고 가서 맛있는 것도 사주시고

여기 저기 구경도 시켜 주시면서 견문을 넓혀 주셨다.

그 당시 초등학생들은 전부 고무신을 신고 다녔는데 난 아버지가 사다주신 운동화를 신은

최초의 학생이 되기도 하였다. 

 

내가 사범학교에 입학하여 제주시에서  방을 구해 자취를 하였는데

아버님은 내가 혼자 자취하는것이 고생스럽다고 아버님도 제주시로 와서  

공장에 다니면서 내가 공부에만 전념하도록 밥도 아버님께서 맡아 하셨다.

혹시 내가 아버님이 회사에서 늦게 올 때면 밥을 해 놓았는데 돌아와서 밥을 해 놓은 것을 보시면

불같이 화를 내시면서 다시는 밥 같은 것 하지 못하도록 하셨다.

정말 자식 사랑이 대단한 분이셨다.

그런 아버님의 사랑을 받은 나는 자식들에게 그렇게 살갑게 대해 주지 못해 답답하기만 하다.

나도 자식들에게 잘 해 주어야지 하면서도 막상 그렇지 못한 것은

천성이 아버지처럼 따뜻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항상 생각하여 본다. 

 

 아버님은 17세때 그린 그림이 국전에 입상할 정도로 미술에 탁월하셨다.

그래서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마자 일본으로 유학을 가셔서 전문학교에서 기계설계를 전공하셨다.

그 당시 일본은 2차 세계대전 중이고 서양 기계가 물밀듯 들어 올때라

기계 설계 담당은 그 회사의 핵심중의 핵심이였으며, 

어디서나 최고의 대우를 받았고 서로 스카웃하려고 야단이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해방이 되자  할아버님과 할머님을 모시려고 제주도로 귀향을 하시게 되고. 

고향인 조천으로 돌아 오신 아버님은 얼마 있다가 곧 조천 면사무소에 다시시게 된다.  

 

내가 본 아버님은 참으로 손재주가 많으신 분이셨다.

저녁에는 전기도 없는 남포등 밑에서 아버님 옷이나 어머님 옷을 뜯어서

재봉틀로 우리들 옷을 만들어 주었는데 그 당시로는 현대적 감각으로 디자인 해서 그런지 

그 옷을 입고 학교에 가면 다른 아이들이 모두 부러워 하였다.

그뿐 아니라 여러 학교의 모표(옛날에는 초, 중, 고등학교 학생들 모자에

학교 상징인 모표를 달고 다녔다)를 디자인 해 주시기도 하였고,

전국 디자인 공모에 응모해서 여러번 입상하여 부상으로 돈도 꾀 많이 받기도 하였다.

내가 편안하게 공부할 수있도록 책상을 만들어 주셨는데 다리를 접었다 풀었다 할수 있게 만들어

걸상에 앉아 공부 할수도 있고 방바닥에 앉아 공부할수 있게 만들어 주시기도 하였다.

그리고 또 저녁에 할아버님이 쓰이던 연장으로 문짝을 만들었는데

그 쏨씨가 뛰어나 다른 집에서 조차 만들어 달라고 주문을 해서 부업으로 꾀 많이 수입을 얻기도 하였다.

 

나는 다른 과목은 어느 정도 자신 있는데 아버지와 달리 미술은 잼병이다.

그 이유는 초등학교 1학년 때 부터 미술을 그려 오라고 하면 으례히 아버지가 1학년 수준으로 그려주었고 그 미술품은 당연히 교실 뒤 게시판에 붙이곤 하였다. 학년이 올라 가도 마친가지였다. 

잘못 그려도 내가 직접 그려야 하는데 아버님은 자신이 직접 그려주곤 했는데 어찌나 아이가 그린 것처럼 잘 그리는 지 선생님은 어른이 그린 것인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그리고 아버님의 필체는 정말 힘있고 빨리 쓰고 아름다웠다. 내가 처음 초등학교에 발령 받은 학교 교감 선생님은 집에서 아버지가 부친 편지 겉봉투 글씨를 보고 이렇게 잘쓴 펜 글씨는 처음 본다고 칭찬이 대단하였다. 아버지는 펜으로 잉크 묻혀 쓰시는데 꼭 인쇄한 것 같았다.

아버님의 이런 재주를 왜 자식들에게 물려 주지 않았느니 야속하기만 하다. 

 

그리고 아버님은 시사와 역사에 참으로 밝으신 분이셨다.

아버님이 학교에 다니실 때에는 국사는 일본것만 가르치고 우리나라 국사를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아버님은 독학으로  공부하여 우리나라 고대사에서 현대사까지 막히는 것이 없었다.

그 당시 밤에는 작은 방에 나와 원환이 그리고 아버지 셋이서 주무셨는데

아버지는 밤 늦게까지 국사에 대해서 이야기 해 주셨다.

그 덕택에 나도 우리나라 국사를 전공하였고 지금도 가장 자신있는 것이 국사이다.

 

아버님은 내가 초등학교에 발령 받자 마자 돌아 가셨다.

1962년 3월 17일 발령을 받았는데 그 해 1962년 5월 말(음력 4월 22일)경에 돌아 가셨다.

경상남도로 발령 되었다는 발령장이 30월 말 경에 집에 도착했는데  아버님께서는 제사상에 할아버님 사진과 할머님 사진  올려 놓고 발령장을 제기 그릇에 놓은채 절을 하도록 하셨다. 그리고 할아버님과 할머님께 당신의 손자가 커서 학교 선생님이 되었다고 축문까지 고하셨다. 그리고 얼마나 기뻐 하셨는지 동네 어른들을 불러 모이 술까지 대접하셨다. 참으로 대견스러웠던 모양이다.

그 때 모습이 나에게는 아버지의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나중에 아버님이 돌아 가시고 난 후 어머님께서 들은 이야기인데

밤 중에 자다가 어머님을 깨우시고는 " 원규가 있는 거창으로  가볼까?" 라고   묻곤 했다고 하신다.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자다가 깨어나 자는 사람을 깨워 그렇게 했겠느냐고 어머님께서 이야기 하셨다.

 그런 아버님을 내 월급으로 아버님 Y셧츠나 내의 한벌 사드리지 못했고, 돌아 가실때에도 임종을 지켜드리지 못했으니 나는 정말 천하에 불효자인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 때 생각을 하면 가슴이 아리고

눈물이 복받쳐 오른다. 저 세상에 가서 아버님을 뵈어야 그 한이 풀리겠지 하고 스스로 위안을 삼는다.   

 

  

    

 

어머님은 아버님과 달리 생활력이 대단한 강한 분이셨다.

참으로 부지런 하시고 억척스러웠으며 자식 교육에 있어서 교육자보다 더 큰 일가견을 가지신 분이다.

 

어머님은 처녀 시절부터 동네에서 망건을 빨리 만드는 사람으로 유명하였다고 한다.

그 당시는 제주도에는 말총이 많이 나기 때문인지 여자들은 노소를 가리지 않고

밤이면 모두 방에 둘러 앉아 망건을 만드는 일이 허다하였다.

작은 바늘에 말총을 꿰고 망건틀에서  한땀 한땀 떠야 망건을 만들게 된다.

아무리 빨리 만드는 사람도 망건 하나 만드는데 6-7일을 걸리게 마련이다.

그러나 어머님은 남들보다 하루 이틀 먼저 만드셨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 갔을 때에도 밤이면 밤마다 남포등 불빛에서 망건을 만드셨다.

말총을 꿰메이는 바늘은 보통 옷을 꿰메이는 바늘 보다 더 작았다.

그래야 망건이 촘촘하게 만들어 지고 값도 더 받기 때문이다.

낮에는 농사일과 집안 일을 하고 밤이면 새벽까지 어두운 불빛 아래서 바늘질을 했으니

눈이 좋아질리 없었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어머님은 눈이 보이지 않아 봉사가 되는것이 아닌지 모두들 걱정을 하였는데 

그 당시는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병원에 갈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는데

누가 구좌면에 있는 송당에 눈을 잘 보는 사람이 있다고 하여  어머님 혼자서 송당까지 걸어서 갔었다. 

나는 지금도 송당을 한번도 가보지 못하였는데  갔다 와서 하는 말이 하루 종일 걸어서 갔셨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송당하면 조천에서 엄청 멀리 있는 곳으로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 분은 어머님 눈을 보고는 바늘로 눈 속에 박힌 가시를 빼 내셨는데 그 크기가 엄청 났다고 한다. 

그 분이 바늘로 눈에 박힌 가시를 빼내는 이야기를 듣고  

사람들은 귀신같은  솜씨를 믿지 못하기도 하였는데 얼마 안 있어 그분이 어머님 초청으로 조천에 까지

오셔섰다.  나도 그 분을 보았는데 키가 크고 검고 긴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그 분이 우리집에 왔다는 말을 듣고는 마을 사람들이 눈을 보이기 위하여 우리 집은 항상 사람들로 북적였다.  어머님은 그 후로 다행히 눈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생활하는데 지장이 없을 정도는 아니였다.

그 후로 아버님와 나는 어머님이 밤을 새워가며 망근을 만드는 일을 못하게 말렸지만

어머님은 식구들이 모두들 잠든 밤중에 일어나 망건 만드는 일을 하곤 하였다. 망건 하나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면 꽤 괜찮은 수입이 되기 때문에 그 일을 그만두지 못하는 것이였다.

참으로 어머님은 한시도 쉬지 않은 그런 부지런한 분이 셨다.  

 

내가 중학교 1학년 때쯤 우리집 뿐만 아니라 조천에서는 양파를 많이 심었었다.

큰 방, 작은 방, 마루방, 채방 할 것 없이 양파로 가득찼고 온 집안이 양파 �는 냄새가 진동을 하였다.

그렇게 많이 지었지만 사가는 사람이 시세를 높게 쳐 주지 않아 수입은 별로였다.

이에 어머님은 직접 자기가 서울로 가서 팔겠다고 우리 양파뿐 아니라 동네 여러집 것도 모아서 

배에 싣고 인천을 거쳐 서울에 가서 팔아 오기도 하였다.

그때에는 우리 마을 조천에서 인천으로 가는 화물선이 출발하는 때라

화물선에 양파를 수 십, 수 백 가마를 싣고 인천으로 향했는데  화물선이 어찌나 느린지

인천까지 가는데 사나흘이나 걸렸고 좀 바람이 불었다 하면 일주일까지 걸렸다고 한다.

그리고 인천에서 양파를 내리고 화물차를 구해서 서울가서 양파를 팔고 제주로 내려 오곤 하였다.

어머님이 서울 갔다 돌아 어면  어머님의 무용담을 들으려고 우리들 뿐만 아니라

동네 사람들까지 삥 둘러 앉아 어머님을 신기한듯 쳐다보며 이야기를 듣곤 하였다. 

그러면 어머님은   "원 세상에에에---"    "천하에 그런일이--"  를 연발하며

인천까지 가는데 어찌나 멀미를 심하게 하는지 배를 탄 동안에는  

밥을 한 숟깔도 �지 못하고 쭈그리고 누워 지낸 이야기며,

인천서 화물차를 구해 서울로 가는 이야기,

서울가서 서울 사람들 안테 주눅들지 않고 제값 받는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 원 세상에에에---그런일이 "  맞장구를 치며 재미있게 이야기를 듣곤 하였다.

나는 그런 어머님이 한없이 자랑스럽고  우리 어머님이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존경심을 가지곤 하였다.

 

그리고 어머님은 농사를 어머님 혼자 다 지으셨다.

아버님은 면사무소를 다녀셨지만 공무원 월급이라는 것이 현금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잡곡으로 배급을 주었는데 그것도 몇달씩 밀리다가  주기 때문에 식구들의 식량으로도 부족한 양이었다.

그래서 어머님은 외할머님 밭을 빌려 혼자 농사를 지으신 것이다.

 보리는 다 자라는 동안 김을 서너번 더 메어야 한다. 김을 자주 메어주는 까닭은

잡초가 보리보다 성장력이 강해 보리보다 더 자라기 때문이기도 하자만

고랑과 고랑 사이를 긁어 주어야 보리가 더 잘 자라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리 밭 메는 것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아침 일찍 부터 점심까지 메어야 이쪽에서 저쪽까지 한 고랑을 멜 수 있으며

점심 먹고  저녁까지 저쪽에서 이쪽 까지 메는 참으로 힘든 일이다.

그러니 밭을 전부 다 메려면  열흘이상  걸렸다. 그러면 다시 처음부터 또 메어야 하고, 두달이상

그 일에 매달릴수 밖에 없었다.

일꾼들을 빌어 메면 2-3일 걸릴 것을 삯을 아낀다고 어머님과 나, 그리고 원환이 셋이서

보리 밭은 다 메어야 했다.

그 뿐만 아니라 추수할 때에도 마차에 싣고 오면 한꺼번에 많이 싣고 오고 힘도 들지 않을텐데

그 삯을 아낀다고 등짐으로 지어 날랐다. 어떤 때에는 등짐을 하루 종일 지어 나르기도 하였는데.

저녁이면 끙끙 앓은 소리를 하면서도 다음날이면 다시 지어 날랐다.

나도 어머님과 함께 짐을 지어 나랐는데  짐을 지고 어머님 앞에 종종 걸음으로 걸어 가는 것을 보고

어머님은  흐뭇한 마음으로 쳐다 보곤 하였으며, 지나가던 사람이 어린애가 짐을 참 잘 진다고 칭찬하면

어머님은 덩달아 기분이 좋아 침이 마르게 나를 칭찬하곤 하였다.

 

 

 

 어머님이 자식들을 키우시는 교육 방식은  남다른 교육 철학을 갖고 자식들을 키우셨다.  

그 교육철학은  어떤 교육학자 보다 더 훌륭하셨고 뛰어나셧다. 

나는 44년을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였고 그래서 교육학 서적도 많이 읽고

현장 교육 논문도 여러 편 썼으며 전국 응모에서 1등급도 받곤 하여 내 나름대로는

교육 이론에 있어 남 보다 자신있다고 자부하였지만  어머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나는 교직에 있을 때에도 이런때 어머님은 어떻게 하였었나? 하고 문제가 있을 때 마다 어머님의 교육 방식을 따르려고 노력하였었다.

어머님의 자식 교육 방식은 첫째 칭찬이다.

아무도 없을 때에는 야단치고 매도 들지만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우리 자식이 최고라고

칭찬을 아끼시지 않았다.  내가 별로 잘한 일도 없는데 주위 사람들에게 칭찬을 하니 그 기대에

따르려고 착한 일만 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둘째 방식은 기대수준을 높이는 것이다.

"넌 이렇게 어려운 것을 어떻게 그리 잘하니?"    "우리 원규는 참 무엇을 잘한다."   

" 넌 앞으로 더 잘 것이다."

이렇게 어머님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을  항상 나에게 칭찬하고 기대 수준을 높이니

무엇을 해도 어머님 기대 수준에 맞게 할려고 노력하고 또 노력했었다. 

 우리 형제가 살아 오면서 사회구성원으로서 역할을 다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어머님의 훌륭한 자식 교육 방법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어머님은 그 당시로서는 동네 유식쟁이에 속한 어른이기도 하셨다.

어머님은 옛날 그 당시 여자로서는 드물게 야간이지만  소학교를 졸업하신 분이셨다. 

동네 고지서 같은 것이 나오는데 이름이 한자로 써서 나오는 일이 많았는데 그럴때 마다 반장 집에서

한자로 된 이름을 읽을 수가 없어  어머님안테 물으러 오곤 하였으며

동네 어른들이 자식안테 온 편지를 읽어 주고 편지를 대신 써 주는 일이 많았었다.

 

이 세상  거의 대부분은 사람들은 자기 부모가  남보다 훨씬 훌륭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살림은 어렵고 힘들었지만 정이 많고 재주가 뛰어 나신 아버님과

생활력이 강하고 자식을 훌륭하게 키우시겠다는 신념이 강한 어머님 사이에 태어난

나는  정말 행운아이고 복이 많은 사람이다. 

오늘날 나를 있게 만들어 주신 아버님과 어머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