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스크랩] 운현궁 , 연산군의 탕춘대와 세검정

제주조천 2006. 8. 15. 16:07
운현궁입니다..매번 산 이야기만 했었는데 잠시 산 이야기 제쳐두고 숨가쁘개 급박했던 그옛날로의 여행 잠시 함께 가 보실까요 ?~~~ 이미지 사진은 지난달 7 월 하순 장마비 그치고 잔뜩 흐린 날에 몇장 카메라에 담아봅니다..아마추어이니까 그냥 편안히 보아주시구요..무더운 여름날 모두들 휴가 떠나고 그런날들입니다..집 떠나면 고생인줄 알면서도 그래도 떠나서 어디든 다녀와야만 될듯합니다..그대께서는 어디로 떠나시려하시나요 ?
저는 조용히 운현궁 뒤안길 한번 걸어볼까합니다...조용히 혼자서 사색의 시간 이곳 운현궁 뒤안길 걸어 볼려구요....왠지 알수없는 눈물이 흐르고 코끝이 찡해져 올지도 모르는 일이구요...고우신 그대께서도 조용히 한번쯤은 어떠하실런지요 ? 아래 사진은 운현궁 뒤안길이지만 넓직한곳 여기 가운데 저 뒷쪽에 둥글게 우물터 보이고 왼쪽 저 뒤 뒤안길이랍니다.고종임금이 어릴적 이곳 마당에서 뛰놀던곳이며 우물터에서 나누었던 고운 옛사랑 보이시나요~~~
제가 극히 일부 알고있는 상식정도의 간략하지만 운현궁 말씀 드릴께요..운현궁 지금의 정문 들어서면 만나는 마당입니다..느티나무 한그루 반겨줍니다..이 집에서 조선왕조 26대 임금인 고종이 태어났지요..고종 이명복이 12 살때까지 어린시절 보내고 이제 임금의 아버지가 되었으니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하게 되면서 이 운현궁은 당시 정치와 권력의 중심지가 되었답니다.. 경복궁의 중건 서원철폐 등등 개혁을 착착 진행 시켜 나갔지요..파란만장했던 조선왕조 구한말 역사적인 현장 눈물과 치욕과 통탄의 현장이 아닐수 없죠.. 운현궁의 사랑방으로 들어가는 솟을대문입니다..저문 들어서면 대원군이 손님을 맞이하고 국가의 중대사를 논의했던 실질적인 중심지 노안당이랍니다..현판 글씨 노안당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체를 뽑아다 사용했으며 아들을 임금으로 두어서 늘그막에 편안히 노후를 보낼수 있겠다하여 노안당 한자로 老安堂 으로 이름 지었답니다..자~~대원군의 집무실 사랑방으로 들어가십시다.. 노안당이지요..대원군은 태어나서 얼마 안되어 조실부모하여 불우한 환경속에서 성장했답니다.몰락한 왕족의 그는 겉으로는 서울 장안의 건달 비슷하게 바보스럽게 행동했으며 남루한 행색에 술과 기생들 품에서 방탕해보이는 가끔은 걸인행세까지 할정도로 똑똑하지 못한행동으로 보냈죠..이유인즉 그당시에는 너무 똑똑해 보이는 왕족의 누구 그러면 어느날 갑자기 어떤일을 당할지 좀 그랬다죠아마..사실은 두뇌 명석하고 철저히 자기자신을 감추고 결국 고종을 임금으로 앉혔으니 이제 대원군의 시대입니다..

이곳 노안당 저 우측 넓은방에서 한많은 생을 마감하게됩니다..이곳 노안당 건물 돌 축대에 몸을 기대어 그옛날을 상상해봅니다..오래된 돌계단 저 계단으로 얼마나 많은 당시의 권력가 세도가들이 오르고 내렸는지 돌계단을 몇번씩 오르내려보며 마루에 걸터앉아보기도 했네요..방안에 들여다보니 대원군께서 사용하셨을 당시에 비품들이 보이고 저 안쪽 사랑방 넓은곳에서 그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답니다..통곡소리 들리어 오네요~~~아이고오~~아이고오~~어이어이~~눈물바다 바로 이자리입니다....꽃상여 타고서 떠나가시는 마지막길에 장안의 가난한 백성들 엎드려 통곡하니 가는길 또한 마음 편치 못했겠네요.. 이곳은 운현궁 뒤안길입니다..머리 아프고 역사 이야기 이제 모두 그냥 지나치는게 좋을듯합니다.. 상식 정도의 짧은 실력 금방 바닥 나겠어요..다 잊고서 그냥 걸어갑니다..5 번 정도 왕복 거닐어봅니다..10 번이면 더 좋구요..지금의 나는 누구이며 나 자신이 앞으로 해야할일은 무엇인가 남에게 피해를 준일은 없는지 남의 마음 아프게 한적은 없는지 반성하고 참회하고 순전히 제 개인적이랍니다..걷노라면 문득 떠 오르게 됩니다..이곳 뒤안길은 사람의 왕래도 많지않을뿐아니라 약간 어두우며 좁고 길쭉하여 길쭉한곳 지나면 뒤안길이라도 넓은 공간이 나오지요.바로 맨위 사진의 뒷마당의 넓은공간이랍니다...

뒤안길 축대위 풀과 나무 바람에 바스락거리고 풀벌래 소리와 아아~~매미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 옵니다..저 매미소리 한번 울기 위하여 너는 땅속에서 애벌레로 3 년 그리고 물속에서 3~4 년을 지나야 비로서 환생해 날개 달고 그것도 비오는 여름 장마엔 울수도없고 비 그치고 나야 네 울음소리 들으니 참으로 너 매미야~~~눈물겹구나~~~감동적이고..이 여름날 매미소리 시끄럽다고들하는데 결코 시끄럽다고 하지 마세요...아아~~거룩하구나~~얼마나 오랜 세월을 너는 오늘 이렇게 짧은 기간 한번 울기 위해 인내하고 참으며 기다려온 그 많은 날들 생각하니~~~이야기가 또 약간 옆으로 나갔네요..매미 소리에 그만~~~ 뒤안길 잠시 걸음을 멈추고 저하늘 바라봅니다..하늘은 흐리고 무더위 찜통 장마비 그친뒤라 습도까지 높아서 불쾌지수 높지만 이따금 뒤안길에서 불어오는 한줄기 시원한 바람 그만이네요..흙냄새 풍겨오고 오래된 축대와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 밑동에서 옛향기 풍겨 나오네요..그대께서도 울고싶은 날 있었겠지요 ??..속상하고 세상살이 힘들고 경제적으로 어렵고 가정에 누가 많이 아프거나 이런 저런 이유로 슬프고할때면 어떡하세요 ?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결코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고 푸시킨인가 하는 사람이 말했었지만 그러지를 못한날이 많았다지요..이곳 운현궁 뒤안길 걸어 보셔요..앞으로 나아갈 길이 보인답니다..어려움을 극복하고 맑고 밝고 웃음이 가득하고 사랑과 행복이 있는곳으로 길이 보인답니다.. 이로당이라는 곳이에요..이곳 운현궁에서 여성들의 은밀한곳... 바깥 남정네들이 도저히 들어 올수 없도록 건물 구조를 ㅁ 로 만들고 식사준비와 온갖 집안일 여종들도 많았을테고요..삼월이 사월이 예뻤을 당시에 고운 님들이시여~~~흔적 쫒아 여기 오니 아무도없고 빈방에 오래된 텃마루만이 보이고..아참 그렇지..여성 전용 숙식처 생활공간 이곳에 지금은 누구든 올수 있어 뭐합니다만 마음 한켠엔 아련히 스쳐 지나가는 그옛날 아리따운 옛님들의 모습 선합니다.. 오른쪽으로 경송비가 보이네요..고종이 어린시절 자라면서 12 세까지 이곳 경송비가 있던 자리에 큰 소나무 1 그루 있었는데 소나무에 올라가 놀았던 그 소나무가 있었던 그자리에 지금은 소나무 없고 비만 남아 있네요..일제시대때에 벼락 맞아 불타 없어졌다고들하는데 정확한 정보는 잘 모르겠지만 이곳 담장 너머 저쪽은 고종의 형..이재면이 살았던 집이지요.. 지금은 누가 살고 있는지 언제나 대문 꼭 닫혀 있고 원래 형인 이재면이 왕위를 받았으면 더 보기 좋았을텐데~~~운명은 그에게 오질 않았죠... 철종 임금의 술과 여자 주색으로 몸이 쉬 탈이 났으니 30대 초반에 서거하셨죠..아무리 힘있고 왕이라하더라도 좋은것도 지나치면 병이 날수밖에요..너무 여자를 밝혔다고나할까요 ? 표현이 좀 뭐합니다만 암튼 헌종의 어머니 신정왕후 조씨는 대왕 대비로서 비상대권을 잡은 뒤 흥선군 그러니까 대원군의 둘째아들 명복이를 왕으로 선택했네요.고종 임금이 되신거지요..

이는 순원왕후가 옥새를 거두어 은언군의 손자 강화도령을 철종으로 세운 전례에 따른 것인데 결과적으로 고종은 12살에 왕위에 올랐고 고종의 아버지 흥선군은 대원군이 되어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한 셈이지요.장안의 기생 춘홍이의 집을 자주 들낙거리며 술을 좋아하고 난초 그리기를 좋아했던 흥선대원군은 정권을 잡자마자 속도감 있게 개혁을 했는데 요즈음도 대통령 당선되면 첫 시작하면서 개혁 개혁 하면서 변화를 시도하는것과 같지요. 먼저 눈엣가시처럼 생각하고 있던 외척세력인 안동김씨를 몰아낸 뒤 당파와 신분에 구애받지 않는 인재를 널리 등용했는데 상민에게만 부과되던 호포를 양반계급에까지 확대했으며 붕당의 뿌리 서원 철폐도 개혁했지요 ...에고고 복잡하네요...뭐 이리 어렵노~~ㅋㅋㅋㅋㅋㅋ 이재면의 집 안을 들여다 볼수가 없네요..누가 살고 있는지~~~담장은 높고 대문은 굳게 닫혔으니~~~뒤편으로 현대그룹 사옥이 보이고 우측으로도 래미안 상호 보입니다.. 이재면 ..이재면 ..동생에게 큰절 올리고 KBS 사극 명성황후 다들 보셨지요..구한말 이곳 운현궁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바람앞에 촛불이었네요..동생이라도 임금이 되었으니 아아~~그의 마음속 까맣게 속이 다 탓을듯합니다..동생이 임금이 되어서 물론 기쁘고 경사이긴하지만 그래도 어쩐지 좀 그렇지요..그치요 ??

고종 임금의 친형이었지만 당시 권력 구조로보아 안동 김씨 그리고 조대비 대원군 사이에 당시 20세가 넘은 장성하고 똑똑한 형 이재면을 선택안하고 궂이 나이어린 12 살의 철부지를 왕으로 앉혔다는것은 임금을 제쳐두고 실질적인 막강 권력을 차지하기 위함이었죠...참으로 권력이 뭔지 대단한것임엔 예나 지금이나 틀림없군요.. 노락당이라는곳이어요..운현궁의 제일 중심이 되는곳이지요..안방마님이 계시는곳이라면 되겠네요..고종의 어머니 여흥 민씨 부대부인 마님~~사극에서 많이들 보셔서 잘 알고 계실줄 압니다..대원군의 위세와 운현궁의 관계를 알 수 있는 하나의 사례는 고종 3년 1866년 고종과 명성왕후의 결혼식 가례라고 하지요.. 운현궁 이곳 노락당에서 명성황후의 성대한 가례가 거행됐지요.. 가례준비 일체를 노락당에서 하였음은 물론이구요 앞서 이로당 여성들만의 공간 이곳에서 철저히 준비 했을테지요..

당시 가례행사를 위하여 1600 여명의 수행원과 700필의 준마가 동원되었다고하니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아실수 있겠지요..회갑연이라던가 생일 생신 명절 등등 집안의 잔치가 모두 이곳에서 행해졌네요..노락당 건물은 고종이 임금이 되고난후 즉시 조대비의 지시로 궁궐 못지않게 화려하게 지어졌답니다..증축하고 또 증측하고 지금의 운현궁은 많이 축소되었지만 최대로 넓었을때는 지금의 덕성여대 일부와 교동 초등학교 일부까지 아주 넓었다고합니다..권력의 무상함을 느끼게 됩니다..

노락당 마당에 관광차 홍콩 아가씨 3 명 서로 열심히 사진 찍어 주고 있네요..저와는 눈인사 가볍게 나누었지만 저 혼자뿐 한국사람 아무도 없네요..저 홍콩 아가씨들 서 있는 저 자리에서 고종 임금과 명성황후의 가례식을 비롯 집안의 잔치가 열렸던 노락당 마당인것을 저 아가씨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아마 알고 들르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여행을 즐겨하는 사람치고 자기가 갈곳은 미리 알아보고 그러거든요.. 노락당 축대 돌계단은 말없이 그대로이고 대들보 기둥 마루 모두 그옛날 그대로인데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이곳에 살고 가셨던 그옛날 님들이시여~~오늘 여기 이름없는 저 들녘에서 예전같았으면 감히 집안에 들어설수도 없었을지도 모를 무지랭이 상민이었을지도 모르고 지금 세월이 까마득히 지나 이제야 나 여기 들르니 아무님도 계시지 않으니~~눈물겹고 눈물겹네요..마루에 걸터앉아 한참을 쉬어도 오는이 없구나...방안에 서있는 인형 마네킹만이 제가 이러고 있는걸 물끄러미 응시해주고 있을뿐 부대부인 민씨의 안방 노락당 위엄있고 잘 지어진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건물임에 손색없지요..
호두나무가 운현궁 뜰에 결실을 위해 조금씩 익어가겠지요..가을이 오면 단풍잎되어 잎사귀는 떨어질테고요.. 우물터입니다..우물터 여러개중 1 곳입니다..예전엔 운현궁을 출입하는 대문만 4 개였다고해요..지금은 1 곳뿐이지만요..규모가 엄청 작아졌다는걸 말해줍니다.. 이 무더운 여름날입니다..운현궁아 잘 있어라 나 자주 들러 너를 기억해 주리니 ~~~발길 뜸하다고 서러워말고~~~ 며칠전 바라본 세검정입니다..세검정..인왕산을 앞에 두고 북악산을 뒤로한 공기 맑고 풍경 좋은 세검정. 북악산으로부터 흘러 내리는 계곡물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육각형의 작은 정자인 세검정은 조선 조 숙종 때 북한산성을 축조하면서 군사들의 휴식처로 세웠다고 합니다..이 정자를 세검정이라 부르게 된 연유는 광해군15년 1623 년에 인조가 능양군으로 있을 때 이곳에서 광해군의 난폭한 정치에 반대한 이귀 김유 등이 광해군의 폐위에 대해서 사전 모의를 한 후 거사에 성공을 하고 다시 돌아와 맑은 물에 피 묻은 칼을 씻었다 해서 칼을 씻은 정자 세검정이라는 이름이 세검이 칼을 씻어서 칼 집에 넣는다는 뜻으로 세검정은 평화를 의미하는 데서 지어진 이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곳에서 우측 뒤편으로 빌라 보이시지요..저 빌라가 서있는 자리가 그 유명한 탕춘대 자리입니다..연산군의 호화 꽃놀이 연회장..수많은 궁녀 미인들을 대동하고 저곳 탕춘대에서 꽃피던 봄날에 술과 여자 풍악소리 드높이 춤과 노래 대단한곳이 바로 이곳 세검정 물길위에 있네요..이곳 물줄기가 안동 하회마을을 낙동강 물줄기가 빙둘러 지나듯이 탕춘대를 한바퀴 돌아나가는 물줄기 정말 빼어난곳에 탕춘대가 자리하고 있죠.. 세검정 바위 아래 모습입니다..구석 구석 보고가려고 자일을 세검정 난간 기둥에 걸고 바위를 내려서니 비로소 이 사진 한장 카메라에 담아봅니다..차곡차곡 돌판 쌓아 올려진 바위 모습이네요..여름에 큰비 내리면 서울 장안 사람들이 물구경를 왔던곳으로 물살이 세고 이곳 정자 바위까지 찰랑찰랑 무섭게 물의 수위가 높아져온다고합니다.. 글씨가 새겨져 있네요..머지않은 옛날에 쓰여진듯 보입니다..세검정에 이렇게 글씨가 새겨져 있는것도 그냥 정자에서 보면 보이지 않구요..세검정 정자에서 물 흐르는 아래로 내려 오셔야 보이지요.. 글씨 다시한번더 카메라 담습니다..백두산과 천지물로 시작되는 글씨가 자세히 보면 모두 읽으실수 있을듯 희미하지만 보여집니다.. 이곳 세검정 백색 화강암 정자에서 물 흐르는 아래로 내려서서 그옛날 많은 시인 묵객들 그리고 장수들의 피묻은 칼을 씻었던 그 장소에 지금 저 들녘에서 머리 감고 발담그고 산행후 세족식을 제대로 즐기고 있네요..삼국시대 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꽃놀이 즐기며 시읊기 대회에 연산군처럼 질펀하게 이곳 흐르는 냇물에 목욕했던 그곳에 나혼자 이렇게 물놀이 하고 있습니다..큰 물소리에 누가 곁에 있다해도 조용한 이야기는 못하드라도 눈빛만 보면 모두 알것같은 분위기가 되어지네요.. 돌은 옛돌 그대로인데 물은 옛물이 아니라네..산은 옛산이로되 물은 옛물이 아니라네~~ 아이고 물은 왜이리 차가운가 한참을 서 있을수가 없구나..... 그옛날 아득히 먼 그옛날 이곳 탕춘대에서 연산군의 질펀한 연회 모습 상상 해 보시기 바랍니다..연산군의 즐거운 한때도 이제는 아주 먼 옛날의 저편에 사라지고 없지만 흔적은 아직 여기 남아있어 나그내 저 들녘에서 시한수 생각납니다.....탕자라 소문난 그대 흔적 뒤쫓아 조용히 여기 들르니 // 수백명 궁녀 대동하고 세검정 백색 바위 물길위 탕춘대 // 나 잊지 못하네 그대 거기 있고 나 여기 있네 // 북한산 고봉들 병풍두른듯하고 북악과 인왕의 흰구름 낮게 깔리니 // 이름모를 들꽃 들풀 나무와 돌들 그대앞에 자리하네 // 그대 노래소리 풍악소리 원한 가득 그대의 독기 // 무심한 홍제천 물 흐르는 소리 그대 속마음 어이 알까하노라...시가 좀 어째 이상합니다..ㅋㅋㅋ

탕춘대터라고 알리는 표지석이 보입니다..지금은 이곳 표지석옆으로 넓은 자동차 달리는 큰길이 나 있지요..구기터널로 불광동 방면 북악터널 지나 정릉 방면으로 말이지요..세검정이 언제 처음 지어졌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세검정을 둘러싼 비봉 문수봉 보현봉 북악산 인왕산 맑은 물줄기가 모인 홍제천이 이루어 낸 빼어난 경치는 무릉도원이라 할수 있네요..

조선왕조가 한양에 수도를 옮겨오고부터 세검정터는 풍류객들이 빈번히 오고가고 발길 끊어지지 않았답니다.. 연산군은 즉위 12년 1506년 이 일대를 놀이터로 만들었는데 이름하여 탕춘대터.. 세검정 물길 바로 위 탕춘대터에 이궁을 짓고 돌을 파서 만든 욕조에서 목욕을 예쁜 궁녀들과 함께 하였으니 음란한 연산군의 또다른 한부분을 보게 되네요.. 탕춘대터..큰돌을 움푹 파서 만든 돌 욕조에서 궁녀들과 질펀하게 목욕을 즐기고 바위에 돌 주전자 만들어 술 가득 담아 늘 술마시고 취하고 요즈음 영화 왕의 남자도 연산군의 이야기로 만들어진 영화인데 스토리가 단단해 잘 만들어진 영화임에 틀림없네요.. 탕춘대 오르는 언덕에 꽃 몇송이 예쁘게 피어 있네요..탕춘대터 옆길을 넓히는바람에 깎고 헐어 내려서 지금 보면 깎아지른 벼랑위에 빌라가 덩그러니 지어져있어 탕춘대라는 표지석만이 이렇게 있을뿐입니다..아이고오~~연산군의 흥겨웠던 한때의 연회로도 저 또한 술 취한듯 머리가 어지러워 기분이 묘해져 옵니다..


출처 : 세월의 길목에서
글쓴이 : 아프로삭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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