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스크랩] 충북 충주 ( 탄 금 대 ) 공원

제주조천 2006. 12. 22. 17:12

 
[충주시 남한강변 탄금대 공원안의 안내도...]

탄금대라함은 "1400여년전 신라 진흥왕 때 악성() 우륵()이 가야금을 탄주하던 곳이라 전한다. 본래 대문산?! ! 繭? 부르던 작은 산으로 밑으로 남한강과 접하면서도 기암절벽에 송림이 우거져서 경치가 좋은 곳이다. 삼국사기()에 보면, 우륵은 가실왕( ) 당시의 가야 사람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가야금을 가지고 신라에 귀화하였다. 진흥왕이 기뻐하여 우륵을 충주에 거주케 하고는 신라 청년 중에서 법지()·계고 ()·만덕()을 뽑아보내 악()을 배우게 하였다.

우륵은 이들의 능력을 헤아려 각기 춤과 노래와 가야금을 가르쳤다 한다. 그는 이곳을 우거지()로 삼고 풍치를 상미하며 산상대석()에 앉아 가야금을 타니, 그 미묘한 소리에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로 연유하여 이곳을 탄금대라 불렀다.고 전한다. 이곳은 달천강과 남한강이 합류되는 지점이기도 해 더욱 아름다운곳이다.

[거문고의 악성 우륵선행 추모비...]

[조웅장군 기적비...]

["혼 목" 1994년 김희경작품...]

[탄금대기 라고쓰인 탄금대비...]

이 비는 남한강 언덕에 열두대라고 하는 100척이나 되는 절벽이 있는데 신립이 전시에 12번이나 오르내리며 활줄을 물에 적시어 쏘면서 병사들을 독려하였다고 하는 곳이다. 이곳에는 신립의 충의심을 기리기 위해 군수 김용은(金容殷)이 건립하고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이 찬한 탄금대비라고 하며 충주의 자랑으로 중앙의 요충지이고 또 청풍명월의 고장이며 임강수, 김생등 예술을 꽃피운 그런곳이기도 하며, 신립과 함께 임경업의 얼이 서려있는 곳이기도 하다고 알려준다.

[우륵 악성이 거문고를 탄 탄금정...]

광무10년(1906)에 충주공립보통학교(현교현초등학교)를 이곳에 건축하고 운동장으로 사용키 위해 상연정을 메우게 되며 육각정은 사직산으로 옮기고 임시 석영으로 사용하다가 , 1955년 당시 충주읍장이었던 박승두가 이 정자가 사직산에 이건되어 있던 것을 탄금대 열두대 위로 옮긴 것이다. 목조로 된 이 정자는 낡아서 1976년 6월 이 자리에 현재의 탄금정을 세우고 6각형이던 천운정은 1977년 호암지 3번 국도 옆 동산에 콘크리트 건물로 6각정 정자가 다시 지어졌다. 고 http://c0c.wo.ro에서 전해준다

[신립장군 순국지지...]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 도순변사(使) 신립(! ! )이 8,000여명의 군졸을 거느리고 와 배수진을 치고 왜장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 ?? ぐ?[西]의 군대를 맞아 격전을 한 전적지이기도 하다. 신립은 전세가 불리하여 패하게 되자 천추의 한을 품고 강에 투신 자살하였다. 탄금대 북쪽 남한강 언덕에 열두대라고 하는 100척이나 되는 절벽이 있는데 신립이 전시에 12번이나 오르내리며 활줄을 물에 적시어 쏘면서 병사들을 독려하였다고 하는 곳이다. 라고 네이버에서 알려준다.

[열두 대라는 바위...]

[열두 대에서 내려다본 남한강 용섬...용머리는 찾았는데...]

[충주 대흥사 전경...]

대흥사는 탄금대 북쪽 계곡의 끝 부분 가물이 내려다 보이는 곳임 추장공 신립장군순절비각 옆에 있다. 종파는 대한불교태고종이며 1955년 오법우 스님이 창건하였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2간에 23.5평의 규모 팔작지붕이다. 요사체가 2동이며 종각이 있고 대웅전 앞에는 4개의 석등과 석탑 석비가 있다. 대웅전 옆에는 이절의 창건자인 오우법스님의 부도탑이 있다. 대흥사의 석탑은 9층석탑인데 아름답기가 그지없다. 하늘을 찌를 듯 서있는 탑신이 아름다워 다시 탑신 꼭데기만 한번더 찍어 올렸다.

[충주 대흥사 대웅전...]

[대흥사 9층석탑과 종각...]

[대흥사 쌍석등과 미륵불...]

[대흥사 9층석탑 상위부분과 쇠종의 아름다움...]

[대흥사 종각앞 목어고...]

[대흥사 산신각...]

[충장공 신립장군 순절비각과 비...]

충장공신립장군순절비(忠壯公申砬將軍殉節碑)는 탄금대 대흥사 뒷편에 있다. 비의 받침돌으 거북 형태로 만들고 앞 뒤 길이가 260cm에 달하고 폭이 147cm이며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거북 형태로 조각한 수법은 간단하며 치졸하다. 빗돌은 높이가 197cm이며 너비가 79.5cm, 두께는 28.5cm로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앞면에는 한자로「忠壯公申砬將軍殉節碑」라 쓰고 뒷면에는 전부 한글로 비문을 쓰고<>안에 한자를 넣어 뜻을 명확히 하였다.

대체로 비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띄어쓰기는 하지 않았다. 비(碑)의 우측면에 사람(서번 박재륜), 글자를 쓴 사람(유재 김성규), 세운사람(충주시장 김태수)을 기록하였다. 蓋石(개석)은 이수형태로 너비 100cm, 두께 51cm, 높이 100cm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앞면과 뒷면에 각각 용 두 마리를 양각하였으나 그 조각 수법이 치졸하다. 고 http://c0c.wo.ro에서 알려준다.

[전 이승만대통령의 친필로 쓰여진 충혼탑 전경...]

이 탑은 서기 1955년 11월에 대한민국 상이군인용사회 충청북도 충주분회와 대한민국제대장병보도회(현 재향군인회)에서 광복 이후 전몰한 충주 중원지역의 장병과 경찰관 군속 군노무자 1568위의 넋을 추모하기 위하여 충혼탑을 건립하였으며 매년 현충일에 제향을 올린다. 건립예산은 200만환이며 건립위원회 위원장 김영호 부위원장 이낙진 오동필 총무군장에 장세진 외 11명의 임원들로 구성되었다. 충혼탑에 모신 영령들은 모두 충주지역 출신자로 1,568위(位)이다.

[1568위의 호국영령들의 위비가 모셔진 실...]

[권태응 항일시인의 감자꽃 노래비...자주색꽃피면 파보나마나 자주색감자...]

["학" 1994년 안재열작품...]

[팔천고혼 위령탑...]

임진왜란은 조선시대 우리가 겪은 큰 전란중의 하나로 왜군은 1592년 4월 14일 부산, 동래를 거쳐 물밀 듯이 진격하였다. 조정에서는 지형조건상 죽령과 조령을 지키는 일이 급선무라고 생각하고 순변사 이일을 경상도에 내려 보냈다고 한다. 이때 신립도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고자 본인도 싸우겠다고 의사를 밝히니 이에 왕은 그를 도순변사로 임명, 보검을 내려주었고 그는 유성룡이 모집해준 군관 80여명 만을 데리고 충주일대로 내려오면서,

각지에서 젋은 농민들까지도 모아 8,000여명의 군졸을 이끌고 4월 26일 충주에 도착하여 4월 28일 신립장군은 휘하 장졸 8,000여명을 이끌고 이곳 탄금대 주변에서 배수진을 치고 왜적의 무리를 맞아 사력을 다하여 고전분투 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천추의 한을 품은채 휘하 장졸들과 함께 장열히 최후를 마친 전적지이다. 라고 http://c0c.wo.ro에서 알려준다.

[팔천고혼 위령탑 정면의 모습...]




출처 : 아름다운 60대
글쓴이 : 정 수 억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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